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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드(El Cid)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3. 5. 23:10
 

엘시드(El Cid,1043~1099.7.10)는 중세 기사 시대에 실존했던 스페인의 명장이다.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즈(Rodrigo Díaz de Vivar)이며 카스티야의 부르고스(Burgos) 근처 비바르(Vivar)출신이다. 시드(Cid)는 스페인식 아랍어로 군주(sidi)란 뜻이지만 투사
(El Campeador,the Champion)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Cid 란 영어로는 sir,lord(군주,영주) 라는 뜻이다. 스페인에서는  최고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시대적 배경

로드리고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에고 라이네스는 카스티야의 소귀족(infanzones)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의 사회적 배경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후세의 전승과는 달리 그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외가는 넓은 땅을 가진 귀족 집안이었으며 그는 페르난도 1세의 궁정에서 나중에 카스티야 왕 산초 2세 로 즉위한 왕자와 함께 자랐다. 산초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1065) 후 22세의 엘 시드를 국왕군 지휘관인 국왕 기수(armiger regis)로 임명했다. 엘 시드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지위에 오른 것은 이때부터 이미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음을 나타낸다. 1067년 그는 산초를 수행하며 무어인들의 사라고사  왕국 원정을 떠났고, 사라고사 왕국과의 협상을 주도해 이 왕국을 카스티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페르난도 1세는 죽을 때 여러 자식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면서 둘째 아들 알폰소 6세에게 레온을 물려 주었다. 산초는 레온을 합병하기 위해 동생 알폰소 6세와 전쟁을 시작했다(1067). 후세의 전설은 엘 시드가 마지못해 산초의 공격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일을 망설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산초의 레온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알폰소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 원정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엘 시드는 산초가 후사 없이 1072년 사모라를 공격하다 전사하고 알폰소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새 왕은 산초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엘 시드의 충성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엘 시드는 '국왕 기수'의 지위를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엘 시드는 이 사람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음)이라는 유력자에게 빼앗겼고 궁정에서 누렸던 영향력도 자연히 줄어들었지만, 계속 궁정에 남아 있을 수는 있었다.
 1074년 7월 그는 아마도 알폰소의 권유로, 왕의 조카딸이자 오비에도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레온의 옛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히메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도 알모라비데인들과 싸우다가 콘수에그라 전투(1097)에서 전사했다. 히메나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엘 시드의 궁정 내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레온 군주인 알폰소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카스티야 사람들은 엘 시드를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대지주 귀족들이 알폰소 6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엘 시드를 영웅으로 묘사한 전기들은 그를 뻔뻔한 귀족들과 중상 모략에 눈먼 알폰소의 무고한 희생물로 묘사했지만, 엘 시드의 유력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아마 그의 몰락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기민하고 빈틈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궁정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산초의 죽음으로 영향력을 잃은 데 대한 원한 때문에 잠시 자제력을 잃었던 것 같다.
1079년 세비야를 지배하던 무어인 왕에게 사절로 가 있던 그는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오르도녜스는 그라나다 왕의 세비야 침략을 지원하고 있었다. 엘 시드는 세비야 근처의 카브라에서 훨씬 우세한 그라나다군을 격파하고 가르시아 오르도녜스를 사로잡았다. 이 승리가 그에게는 몰락의 첫걸음이었다. 1081년 그가 알폰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무어인의 왕국 톨레도를 무단으로 공격하자 알폰소 왕은 엘 시드를 카스티야에서 추방했다. 그후 여러 차례 화해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081년 이래 엘 시드는 두번 다시 장기간 알폰소의 영토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이슬람 교도에 대한 봉사
 추방당한 엘 시드는 이제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 사라고사에서 알하게 되었다. 그가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조와 처음 접촉한 것은 1065년이었다.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사라고사의 왕 알 무타민은 허약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그리스도교 전사 엘 시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엘 시드는 알 무타민과 후계자인 알 무스타인 2세를 거의 10년 동안 충성스럽게 받들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스페인 아랍 국가들의 복잡한 정치와 이슬람 율법 및 관습을 터득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그는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082년 엘 시드는 알 무타민을 위해 레리다의 무어인 왕과 그의 동맹군인 그리스도교 군대를 격파했다. 이 그리스도교 군대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도 끼어 있었다. 1084년에는 아라곤 왕 산초 라미레스가 이끄는 대규모 그리스도교 군대를 무찔렀으며 이런 승리에 고마움을 느낀 무어인 군주들은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1086년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데  왕조가 대규모로 스페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사그라하스에서 참패를 당한(1086. 10. 23)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에 대한 적개심을 억누르고, 그리스도교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군인 엘 시드를 망명지로부터 불러들였다. 엘 시드가 1087년 7월에 알폰소의 궁정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는 다시 사라고사로 돌아갔고, 그후 스페인 내 그리스도교 왕국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알모라비데와의 전투가 여러 전략 요충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엘 시드는 어느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엘 시드는 이제 부유한 무어 왕국인 발렌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정치적 책략에 착수했다. 그의 첫번째 조치는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렝게르 라몬 2세를 테루엘 근처의 테바르에서 참패시킴으로써(1090. 5) 이 목적은 이루어졌다. 그후 몇 년 동안 엘 시드는 발렌시아와, 이제 자기에게 공물을 바치게 된 발렌시아 통치자 알 카디르에 대한 지배력을 조금씩 강화했다. 1092년 10월 카디(최고 행정관)인 이븐 야하프가 알모라비데의 정치적 지원 아래 반란을 일으켜 알 카디르 왕을 살해했을 때, 엘 시드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엘 시드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물샐틈없이 포위해 몇 달에 걸친 공격을 퍼부었다. 포위를 돌파하려는 알모라비데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1093. 12). 결국 1094년 5월 이븐 야하프는 항복했고 엘 시드는 마침내 정복자로서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지배권을 쉽게 빼앗기 위해 우선 이븐 야하프와 협정을 맺었고 이븐 야하프는 반란과 국왕 시해가 용서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협정의 목적이 달성되자 엘 시드는 이븐 야하프를 체포해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엘 시드는 이제 그리스도교도만이 아니라 이슬람 교도들의 최고 행정관으로 행세하면서 발렌시아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알폰소 6세를 대신해서 발렌시아를 차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발렌시아를 다스리는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은 1096년 그리스도교 교회가 되었다. 프랑스인 주교 제롬이 새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상당수의 그리스도교도 이주자들이 발렌시아로 들어왔다. 엘 시드는 맏딸 크리스티나를 아라곤 왕국의 왕자이며 몬손의 영주인 라미로와 결혼시키고, 둘째 딸 마리아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결혼시켜 군주로서의 지위를 과시했다. 엘 시드가 그토록 많은 정력을 바친 위대한 사업은 덧없이 무너졌다. 그가 죽자마자 발렌시아는 알모라비데 군대에 포위되었고 발렌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알폰소 6세가 직접 개입해야 했다. 그러나 왕은, 그리스도교도의 중심 지역을 방어하는 데 긴급히 필요한 대규모 병력을 발렌시아에 상주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판단은 옳았다. 그는 주민들을 옮긴 다음, 그 도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1102년 5월 5일 알모라비데 군대는 발렌시아를 점령했고 이 도시는 그후 1238년까지 이슬람 교도의 손에 있었다. 엘 시드의 유해는 카스티야로 옮겨져 부르고스 근처에 있는 산페드로데카르데냐 수도원에 다시 묻혔는데, 그의 무덤은 수많은 참배객이 찾아드는 묘지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 시드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탁월한 장군이었고 강철같은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능란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볼 때, 그의 역사적 역할은 심각한 비판을 면치 못한다. 그가 알폰소 6세와 화해하기를 꺼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동부 지역에서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로 한 것은 알폰소 왕이 엘 시드의 도움 없이 알모라비데 제국과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일대기는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곧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격상시켰고 복잡하고 과장된 그의 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전기에는 전설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전설은 12세기 카스티야에서 지어진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 El cantar de mío Cid〉와 1637년에 초연된 피에르 코르네유의 비극 〈르 시드 Le Cid〉의 영향으로 더욱 과장되었다. 역사가들이 믿을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 당시의 문헌과 〈로드리고 일대기 Historia Roderici〉(12세기에 라틴어로 작성된 엘 시드에 관한 믿을 만한 연대기) 및 그의 발렌시아 정복을 직접 목격한 아랍 역사가 이븐 알카마의 상세한 기록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P.E. Russell 글
번역문 출처-http://blog.empas.com/uskne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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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에 있는 엘시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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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드와 그의 아내 시멘(Chimena)이 잠들어 있는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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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 대성당이 보이는 부르고스 시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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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왕궁의 군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엘시드의 검 티조나(Tizona)이다.
1999년에 감정해본 결과 실제로 11세기에 이슬람의 도시 코르도바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검의 극히 적은 일부 금속만 채취해서 분석했기 때문에 검날이
다마스커스강(Damascus steel)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음은 1961년에 제작된 영화 엘시드(El Cid)이다.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했으며
음악은 미크로스 로자(Miklos Rozsa)가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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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오라 평원에 있는 마상경기장

카라오라의 영토 귀속문제를 두고 카스틸과 아라곤 양국사이에 분쟁이
생겼는데 엘시드가 카스틸의
 
대표로 나가 아라곤의 수석무장과 결투를 벌여 승리한 뒤 카라오라를 카스틸의 영토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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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경기장에서의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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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부터 추방되어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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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른 문둥이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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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가 엘시드의 자비에 감사하며 그를 축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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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르는 군대와 함께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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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만에 돌아와 수도원에 있는 그의 아내와 딸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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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공격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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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연안의 부유했던 도시 발렌시아성을 1년반동안 포위하여 모든 보급을 차단시킨뒤
굶주리게된 주민과 병사들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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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성에 무혈입성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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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성밖에 집결중인 벤 유사프의 군대를 공격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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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벤 유사프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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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드와 그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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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엘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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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화살에 맞은 상처로 이미 숨진 상태지만 그의 유언대로 말에 단단히 고정시켜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출정하고 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나타나자
그의 군대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적들은 놀라서 도망치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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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났는데 그를 태우고 해안을 달리고 있는 말

El 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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