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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 산출지에 관해서 언급된 Web의 모음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6. 27. 22:14

사금 산출지에 관해서 언급된 Web의 모음

지명
(가나다순)

Web에 언급된 내용

출처

강원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사금(砂金)을 깰 준비를 하고 있지요."

그 때 내가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에 들어가 인적이 드문 상류 살둔까지 심산(深山) 계류(溪流)의 낚시를 탐사하기 위하여 들어간 일이 있다. 미산리에서 얼마나 갔을가, 원시 장글 속에서 폭포수 소리가 났다. 원시림 속에 숨어서 홀로 물을 토해내고 있는 폭포는 절경이었다. 폭포의 아래에는 원시의 격류가 흐르고, 폭포의 위에는 수 천 수 만 수 억년 동안 오대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모여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지에는 놀랍게도 움막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 무엇하십니까?"

"사금(砂金)을 깰 준비를 하고 있지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 분지의 모래 속에는 금이 가득하여, 사금을 채취하려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설명이었다. 하천과 분지의 생성 과정들에 관한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보아도 그곳은 엄청난 양의 금이 있을 것 같았다.
 

송우 사이버 기념관

강원 정선군 동면 몰운리

정선 소금강 계곡에는 금 캐는 마을이 있다.

소금강 입구 다리에서 차로 10분 정도를 가다 보면 오른 편에 '금광 마을 한치'라고 쓰여진 안내판이 나온다.

행정지명으로는 동면 몰운1리. 몰운리 보다 그냥 한치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이 곳은 한 때 금광과 사금채취로 근방에서 가장 잘 살던 마을이었다. 한국판 '골드 러쉬'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 곳의 금 역사는 80년이 넘었다. 1920년부터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사금 채취가 시작 돼 1980년대 말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또 가산갱이 1920년대 처음 개발된 이후 1991년 폐광되기까지 이 마을 사람들과 삶을 같이 해 왔다.  그래서 지금도 이 마을 노인정에선 금과 얽힌 사연들이 오늘 일처럼 막걸리 상 안주가 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금에 대해서는 도사다. 대부분 평생 금점(금 캐는 사람)을 업으로 살아 온 사람들이다. 지금도 금만 보면 순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눈에 척 알아낸다.

한치 마을이 '사금 마을'이 된 것은 마을 지층에 묻혀있는 금맥이 풍화작용에 의해 토사와 함께 강으로 흘러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하늘 아래 첫 동네,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지만 이미 일제시대부터 전기가 들어 온 마을이다. 정선읍 보다도 먼저 전기가 들어온 마을이었다고 지금도 자랑삼아 얘기한다.

일본 사람들이 금광 개발을 위해 전기를 설치한 덕을 봤다고 들려주면서.

금광 경기가 좋던 시절, 동면에 있던 장춘 식당은 정선에서 가장 '물 좋은' 색시 집이었다. 금이 많이 나올 때는 돈 걱정 없이 풍류를 즐겼던 예전의 주담(酒談)들을 너나 나나 가지고 있다.

주로 금광에서 일을 하거나 사금을 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생활을 꾸려 온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사금 채취가 한창 일 때는 하루에 50∼60명이 마을 동천에 몰려 그 맑은 계곡 물이 온통 흙탕물(사금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강가의 흙모래를 퍼 올려야 한다)로 변했다고 한다.
 

강원대학교

강원 정선군 동면 화암리

정선 화암동굴 인근에 금광촌 조성

강원도 정선군 동면 화암동굴 인근 폐금광 일대에 금광을 주제로 한 체험형 문화관광단지가 들어선다.

정선군은 46억원을 들여 이르면 오는 9월 착공, 내년 말까지 금을 테마로 한 체험형 금광촌락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근 실시설계 중간보고회를 가졌다.

연간 30만여명의 관광객이 찾는 화암동굴과 연계해 조성되는 금광촌은 4천1백63평 규모로 금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초가 및 돌집과 합숙소.잡화점.선술집.대장간 등을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 한 생활의 장과 사금채취,금원석을 부수는 수채, 화약고, 발파 체험장 등 금을 캐는 과정 일부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밖에 관광객들의 편익을 위해 은행나무 쉼터,향토수종 군락지를 꾸미고 어린이들을 위해 각종 볼거리를 설치한 황금 터널과 이를 둘러 볼 수 있는 관람 열차도 배치할 계획이다.

정선군 관계자는 "오는 8월 실시설계가 끝나면 이른 시일 안에 금광촌 조성사업을 시작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금광촌락이 조성될 정선군 동면 화암리 천포광산은 일제시대 금을 캐던 곳으로 1945년 해방과 함께 폐광됐다.
 

강원일보

강원 태백시

어평재 부근에는 옛날부터 사금을 많이

혈리굴 (穴里窟) ― 혈리초등학교 뒤쪽 산밑에 있다. 입구가 높이 약 3m, 넓이 약 4m되는 거대한 석회동굴로 혈리 마을의 이름이 생기게 한 동굴이다.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없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는 약 1,000m 정도 된다. 동굴 안쪽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호수와 폭포, 광장 등이 있고 가장 안쪽에는 아직도 동굴이 생성되고 있 으며 진흙뻘이 있다. 일제 때 혈리에서 사금(沙金)을 채취하던 사람이 동굴 속에다 황금을 감추어 두었다는 이야기 가 전해지나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굴 안쪽 진흙뻘 속에 사금이 많이 묻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평재에서 내려오는 하천물이 지하동굴로 스며들어 이곳 혈리굴로 나오는데 어평재 부근에는 옛날부터 사금을 많이 캐던 곳이니까 그렇다.
 

태백소식

경기 양평군 강하면 항금리

내에서 사금을 채취하며

본래 양근군 남중면의 지역으로서 고려때 황금이 많이 났으므로 황금골 또는 황금동, 함금이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문리 일부를 병합하여 항금리라 해서 강하면에 편입되고 1988년 8월 1일 현재 3개반으로 형성 관할하고 있다. 본래 황금리라 유래된 것으로 이 마을 뒷산에는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하여 황금리라 한 것인데 이를 감추기 위하여 항금리라 유래된 곳. 현재도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에서 사금을 채취하며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금광을 하여 금을 많이 캤다고 한다.
 

관광양평

경기 여주군 금사면

관내 하천에서 사금이 많이 채취되어

금사면은 삼국시대 성지매(省知買)로 금사리로 불리우다 통일신라 태종 무열왕 7년(서기 660)에 술천성으로 개칭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에 기천, 천령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예종 원년(1469)에 여흥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사면으로 개칭되었다.

금사면은 옛부터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남한강 및 관내 하천에서 사금이 많이 채취되어 이에 금사면(金沙面)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코커스닷컴

경기 포천군 영중면 금주리

탄광에서는 사금을 채취

작년에 월간 "산"지 ' 이오봉의 실버산행 시리즈 {32}'로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산은 포천군 영중면 금주리에 위치한 작은 동네 산이지만. 등산하기에 만만치 않은 산세를 갖고 있다. 만세교 옆의 금룡사 뒷편으로 직등하는 코스는 경사도가 심해서 꽤나 힘이 든다.

예전에 광산터가 있었던 산이라서 지금도 재수가 좋으면 금을 주을 수 있다고 하며, 80년대만 해도 이 부근 탄광에서는 사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의정부, 송우리를 거쳐 포천읍을 지나면 운천방향으로 다리가 있다.
 

한국의 산하

경북 김천시 어모면 중왕리

사금이 산출되었고

자랑내. 긍천(矜川) 노리기와 밤주골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합수된 지점을 자랑내라 하는데, 이곳에서 옛날 규석과 사금이 산출되었고, 또 강진휴라는 사람의 효자비도 냇가에 있어 자랑스런 내란 뜻에서 자랑내라 했다. 지금은 냇가에 한 집이 있고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양계장이 있고 5, 6 가구가 살고 있다
 

김천시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砂金(사금)이 많이 났다고

옛날에 이곳에 砂金(사금)이 많이 났다고 하며 또한 금이 샘같이 많이 난다고 금정이라 하였으며 상.하마을을 구분하여 아래에 속한다고 하금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화군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단천동

안동 사금광산

(한국지질자원 연구원의 국내 금속광산DB중의 하나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사금과 중석이 많이 나

금화저수지 상류계곡을 “금화계곡”이라 하며 가산면 금화리에 위치한다. 계곡 위쪽지역에서는 사금과 중석이 많이 나 일제때에는 “소화광산”이라고 하는 큰 광산이 있었으며 이때 마을이 새로 생겼는데 동네 이름도 사금과 중석이 많이 나는  광산에 연유하여 “금화”라고 지었다고 한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담수된 금화지와 계곡주변에 관광농원이 조성되어 있어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특히 여름철엔 시원하여 피서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주변 식당의 보양탕은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좋다. 또 금화저수지 제방쪽 도로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신라시대 전통사찰인 금곡사가 자리해 있으며 산너머에도 역시 전통사찰인 대둔사가 있어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산중 깊숙이 들어서 있어 고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칠곡군

서울 송파구 방이동

개울에서 사금을 캤다

몽촌은 사금이 많기로도 유명했다. 70년대까지도 사람들은 지금의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부근에 있는 개울에서 사금을 캤다. 덕분에 외지사람이 많아 몽촌은 타 지역에 비해 발전이 빨랐다. 신경문 회장(67)은 인근 마을에서 가장 전기가 빨리 들어왔다고 전한다.
 

동부신문

울산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사금(砂金)을 캐던 곳이라

중리 서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다. 사철(砂鐵)ㆍ사금(砂金)을 캐던 곳이라 하여 토점 이라 했다고도 한다.
 

땅이름 국토사랑

전남 보성군

율어면 칠음리/
문덕면 봉정리/
복내면

사금이 많이 나기로

예로부터 보성지방에는 금광이 여럿 있었고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도처에서 금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율어면의 칠음리에는 당시의 금굴이 지금도 남아있고 면소재지인 문양리의 여시개미란 곳에서도 질좋은 금이 나왔으며, 문덕면 봉정리 오얏등은 사금이 많이 나기로 이름난 곳으로 금방앗간이 있었고 복내면의 구 소재지도 사금을 채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니 보성(寶城)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그냥 붙여진 허명(虛名)이 아니다 할 것이다.
 

태백산맥

전남 해남군 송지면 사구리

예로부터 사금이 많이 난다하여

송호 해수욕장은 만조때에도 600미터 이상을 걸어 들어가도 사람키를 넘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얕아 안전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썰물때면 바닷가에서 고동과 소라 등을 줍는 재미도 함께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다낚시를 즐길 수도 있어 가족 해수욕장으로 손색이 없다. 사구미 해수욕장이 있는 사구리는 예로부터 사금이 많이 난다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자랑한다.
 

go365

전북 김제시

사금이 채취되었기 때문

김제에는 금구리, 금산리, 금강리 등 쇠 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유난히 많다. 신라 때부터 사금이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시대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노다지꾼, 그들을 따라 들어온 밥집, 술집들로 김제군 동쪽 일대가 북적거리기도 했다. 또한 일제 시대에는 전라북도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기름진 땅을 탐낸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부산대학교

전북

봉남면 내광리/
김제시 백학동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사금채취를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낚싯대라 봐야 꽂기식 대나무 낚싯대와 손잡이 대가 손목만큼이나 굵은 플라스틱 낚싯대가 전부였지만 그저 낚시를 간다는 즐거움에 약간의 흥분도 있었다. 두 사람이 일주일 먹을 식량과 소품을, 당시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던 짐자전거에 싣고 집에서 8km 정도 떨어진, 봉남면 내광리로 행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사금채취를 하고 구덩이를 메우지 않은 방죽이 여럿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낚시를 더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 좀 더 집 가까운 저수지로 옮겼다. 김제시 백학동 진관마을 앞 성당방죽. 이곳 역시 일제시대 때 사금을 채취한 후 메우지 않은 곳이다.

 

붕어낚시21

충남 아산시 도고면

하천에서 사금을 채취하다

유난히 학(鶴)이 많았던 우리고장은 학과 온천에 연관된 전설이 많으며, 특히 신라시대 어떤 왕자가 행차중 자연적으로 용출하는 약수터에서 다리가 부러져서 병을 앓던 백로가 수개월을 이곳에서 거닐다가 이곳에서 완치하여 날아갔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삼봉 산하에 있는 신라동(지금의 신성리)에 숙소를 정한 후 수차에 걸쳐 목욕을 하기위해 행차하였던 바 그후 지병인 피부병이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때 편능이라는 사람이 샘을 만들고 그 물 한그릇에 1전씩 돈을 받고 팔았다는 설이 있으며, 1921년 일본의 고목덕미가 이곳 하천에서 사금을 채취하다 유황 약수온천을 발견한 후 시주하여 개천한 것이 도고온천의 시초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토비스

충북 옥천군

사금, 흑연 등의 광산물과

동부는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마니봉, 월리봉, 대성산등이 중첩되어 있고 금강 상류가 감입곡류(바위사이를 구비구비 돌아 마치 뱀이 움직인 것 같다하여 사행이라고도 함)을 하며 북서류하고, 경부고속도로 및 철도가 군내를 관통하고 있으며 사금, 흑연 등의 광산물과 하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명승고적이 많고, 삼국시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 삼국공방과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동쪽으로 경북 상주군, 서쪽으로 대전직할시, 남쪽으로는 영동군, 북쪽으로 보은군에 인접한 약 539.22㎢의 지역으로 대전의 근교 농업지로서 또는 대전 근교의 공업단지로서 발전이 기대되며, 대전위성도시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남한의 중앙점에 위치하여 앞으로 옥천군을 중심으로 세계화에 앞장 설 수 있는 발전상이 기대되는 한국 최고의 지역이다.
 

옥천군

충북 충주시 앙성면

앙성천에서는 사금이 채취되기도

충주시 앙성면에 들어서면 기운찬 국사봉과 건너편의 듬직한 양지말산이 마주 보는 사이로 10여개의 온천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탄산온천으로 잘 알려진 앙성면 능암리와 돈산리 일대의 온천 마을이다.

이곳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중석 광산이 있던 지역이다. 82년 폐광되기 전까지 한때 1000여명의 광부가 생활할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앙성천에서는 사금이 채취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충주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 중앙탑을 지난 곳에 있는 창리는 철광 산지이기도 했다.
 

주간동아

http://www.gemt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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