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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본문
타베르니에가 묘사한 다이아몬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코이누르이다. 이 이름은 "빛의 산(Mountain of Light)" 이란 의미를 지닐 만큼 환상적인 매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 전설의 기원은 인간과 신이 함께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어느날 아침, 가난한 코끼리지기의 딸이 인도의 신성한 7개의 강 중 하나인 야무나(Yamuna)강의 뚝 위에서 놀다 갈대 사이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어린이를 발견했다. 그의 이마에는 현란한 "빛의 돌"이 박혀 있었다. 카르나란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태양신 수리아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세도 있는 카우라바스가(家)의 왕자였다. 카르나의 집안은 사촌인 판다바스가와 왕권을 놓고 알력이 발생하여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 싸움은 길고 또한 잔인한 전쟁으로 타락하였다. 카르나의 이마를 장식하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그를 무적으로 만들었고 젊고 대담한 그는 모든 판다바스 중에서 가장 용맹스런 아르주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싸움에 참가했던 신들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신의 세력은 판다바스의 편을 들어 크리시나라는 사람으로 화하여 운명의 척도를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카르나는 살해되었고, "빛의 돌"은 먼지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후 이 젊은 여인이 야무나강가에서 우연히 이돌을 발견하여 시바신의 사원이 있는 가장 가까운 마을인 타네사로 가지고 갔다. 이것을 바라문교의 한 승려가 시바상의 광명의 눈이라는 세 번째 눈으로서 이마의 한 가운데 박았다. 몇 세기동안 "빛의 산"은 사원을 비추었고, 교도들에 의해 빈틈없는 경계가 펼쳐졌다. 후세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 고약한 사람이 이 돌을 훔치려고 사원에 숨어들었었으나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한 바라문도는 "이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는 가장 최악의 불행을 경험할 것이다. 오직 신과 여인만이 이것을 무사히 지닐 수 있다" 고 전했다. 그같이 이 코이누르 에는 시바의 계율과 악의 힘이 관련되어 있다고 믿어졌다. 이것을 소유하려고 시도했던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사실로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오직 여왕의 소유물이 되었을 때 코이누르는 그 무서운 힘을 잃었다. 역사상 코이누르는 1304년의 연대기에 말와 (Malwa)의 왕 재산 목록에 처음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비사포 광산에서 발견되었고 또한 발견 당시에는 600캐럿 이상의 중량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그럴 듯하기는 하나 정확한 자료는 아니며 처음 그 돌이 언제, 어떤 상태에서 커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1526년, 지금의 파키스탄지역 너머까지 지배하던 타메레인 (Tamerlane)의 자손으로 인도 북부의 펀잡(Punjab)을 침략하여 라호르 (La hore)를 빼앗고 세운 무갈(Mogul)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바브르 (Babur)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델리(Delhi)를 침범한 바브르는 국왕을 살해하고 그 미망인으로부터 항복의 표시의 하나로 "전세계 경비의 하루치"라 표현했던 "빛의 산"을 받았다. 200여년간 이 전설적인 돌은 다른 많은 보석들과 함께 무갈 황제의 소유물이 되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무 므타즈(Mumtaz)를 기리기 위해 타지마할(TajMahal)을 지었던 샤 자한 (Shah Jahan :1628-58)은 궁중의식을 격상시키기 의하여 이 다이아몬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타메레인의 자손의 힘도 결국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 돌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665년 샤 자한의 아들이 전설적인 프랑스 보석상인 타베르니에에게 보여주면서'그레이트 무굴'로 알려진 이후다. 아우랑지브의 증손으로서 제국을 지배하던 무하마드 샤 (Muhammad Shah)는 1738년 근자에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 나디르 샤 (Nadir Shah)라는 터키출신의 장군에 의해 침략을 받았다. 1739년 2월 13일, 무하마드 샤는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델리는 페르시아의 점령군에 의해 약탈되었다. 전리품은 막대했으며 그 속에는 유명한 공작옥좌 (peacock Throne)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작 옥좌는 페르시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국왕의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이 옥좌는 복제품도 많은데다가 기록도 서로 모순된 점이 많아 원래 옥좌의 행방은 확실치가 않다. 이 옥좌는 다른 보물들과 함께 이란의 국가재산의 하나로서 이란 중앙 은행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란에서 는 왕권을 상징하는 의식용 왕관과 홀을 사용할 때에는 전표에 사인을 한 후 사용 후 즉시 반납하도록 의무 지워졌었으나 호메이니가 팔레비 정권을 전복하자 그러한 보석 장식품을 의식에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지금 은 통화의 밑받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디르 샤는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부터 페르시아의 지배자로 뛰어오른 인물로서 인도에 침입하여 앞길을 막는 2개 군단의 병력을 퇴치하고 델리로 들어갔다. 몇 명의 분개한 인도인이 나디르 샤의 보좌관 한 명을 죽이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자 나디르 샤는 화가 치밀어 부하에게 하루종일 인도인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약 3만에 가까운 인도인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또한 그는 약탈에 몰두하여 많은 금과 은, 보석등 값비싼 물건을 노략질했다. 나디르 샤는 궁중 보물 중에서 코이누르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조사하게 했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 하마드 샤의 후궁 중에 한명이 배신하여 그것이 무하마드 샤의 터번속에 감춰져 있다는 정보를 나디르 샤에게 알려주었다. 교활한 나디르 샤는 계략을 궁리하던 끝에 서로를 존경하는 표시로서 터번을 교환하는 동양의 관습을 생각해내었다. 나디르 샤는 연회장에서 무하마드 샤를 칭송하며 선의와 상호간의 우정의 표시로서 터번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이러한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터번은 교환되었다. 밤에 나디르 샤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무하마드 샤의 터번을 풀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굴러 나왔다. "코이누르(빛의 산 이여)!"하고 나디르 샤는 외쳤다. 그후 이 다이아몬드는 "코이누르(Koh-i- noor)"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도 이 다이아몬드를 오래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 포악하고 잔인한 지배자 나디르 샤는 1747년 네 명의 부하들에게 암살되었고 네 왕은 오랫동안 왕자를 계승했다. 네 명의 왕 중 하나인 세이드 무하마드는 코이누르를 갖기 위해 그의 전임자 샤 루크 미르자를 장님으로 만들고 가장 고통스런 고문을 가했으나 샤 루크는 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1751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왕권을 잡고 있던 아메드 샤 두라니는 이 사건이 해결되도록 결정적인 중재 역할을 했다. 그는 샤 루크를 석방시키도록 했고 감사의 표시로서 많은 양의 보석을 선물했다. 1793년 그 돌은 아메드 두라니의 손자인 자만 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는 친동생인 잔인한 수자엘 물크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만은 감옥의 작은 방 진흙벽 속에 이 돌을 밀어 넣고 코이누르에 대해 함구했다. 그것은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수자엘 물크도 잠시 그것을 소유했을 뿐이었다. 그도 조카인 마무드에게 왕위를 쫓겨나 추방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크의 지배자로서 "펀잡의 사자"라는 별명 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란 지트싱에게 피난처를 구했다. 수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코이누르를 지키려고 했으나 지배자가 팔 것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란 지트싱이 돌의 가격을 묻자 수자는 오만하게 말했다. "힘센 사람 다섯을 데려 오십시오. 우선 한 명이 그 돌을 북쪽으로 던지고, 다음 사람은 동쪽으로, 다음엔 남쪽, 그 다음엔 서쪽으로, 마지막 사람은 공중으로 그 돌을 던지게 하십시오. 그 다음 돌이 떨어진 외곽에 금을 긋고 그 공간을 금으로 가득 채우면 「빛의 산」의 가치와 비슷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코이누르는 1813년 다시 인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란지트 싱은 이 돌을 다른 2개의 다이아몬드와 함께 팔찌에 세트하였다. 올드 인디언 방식으로 커트된 코이누르의 총중량은 186캐럿이었고 이것은 1849년까지 라호르의 보물고에 남아있었다. 뒤이은 제2차 시크 전쟁에서 시크교도들은 패배 당했고 펀잡은 시크교도의 반란후에 영국 통치가 되어 동인도 회사가 이 보석을 소유하게 되었다. 코이누르는 영국 해군 함정 메디아호로 1850년 극비리에 뭄바이를 떠난다. 두 명의 호송장교만이 비밀을 간직한 채 영국에 도착한 코이누르는 1850년, 퀸 엘리자베 스 I세가 세운 동인도회사 창립 250주년 기념 연회를 하던 성 제임스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1851년에 런던의 수정궁 전시관에 전시되었으나 커트한 면(面)도 불완전하고 반짝거림도 시원치 않아 많은 사람 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이것을 재커트하기로 결정했다.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코스터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다이아몬드 커터인 포르상거라는 사람이 이 작업을 위해 런던에 왔다. 빅토리아여왕이 이 보석의 새 형태와 스타일을 결정하고 의식용 보석장식품 세공사의 지도 아래 4마력의 증기 엔진이 설치되었다. 알버트 왕자가 이 다이아몬드를 돕(dop)에 세트하고 웰링턴 공작이 시동을 걸었다. 이 커팅 작업을 하는데는 보장거가 하루 12시간의 노동으로 38일의 기간을 소비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기적이라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리전트(Regent)를 커트 하는데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 작업을 하는 데에는 40,000달러 의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이 코이누르는 그전의 올드 인디언 커트의 186캐럿에서 오발 브릴리언트의 108.95캐럿으로 43%가 감소되었다. 여왕은 여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이것을 소유한 남자에게는 불행이 온다는 코이누르의 미신적이기는 하지만 진지한 인도의 옛 전설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녀는 이 다이아몬드가 남자에게 상속되었을 때에는 오직 그의 부인만이 착용하도록 지정했고 이 요구는 항상 존중되어져 왔다. 빅토리아여왕은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새로이 커트된 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브로치에 끼워 넣었다. 빅토리아여왕은 이것을 알렉산드라 여왕에게 유산으로 물려 주었고 그녀는 대관식에 이것을 착용했다. 1911년 이 코이누르는 메리 여왕을 위해 만들어진 왕관에 박혔고, 1937년 엘리자베스 여왕 어머니의 왕관으로 옮겨졌다. 왕실의 칭호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는 공식적인 행사 때마다 이 코이누르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다녔다. 이것은 런던 탑에 있는 모든 영국 왕실 보석 중에서 예외적인 것은 아니나 가장 유명한 보석 중의 하나이며 또한 장구한 역사를 지닌 보석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코이누르의 옛 모습(좌)과 재연마한 후의 현재의 모습(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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