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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젠트 다이아몬드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5. 2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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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젠트는 프랑스 왕실의 가장 뛰어난 다이아몬드이며 또한 탐욕과 살인,후회의
이야기가 서막을 장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는 1701년, 인도의 크리스나 강변 파티알광산에서 발견되었다.
세인트 사이몬에 따르면 이 돌은 무갈 제국의 한 광산에서 일하던 노예가 발견하여
자신의 은밀한 부위에 숨겨 착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신빙성이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야기는 런던의
보석상 스트리터가 저술한 "Precious Stone & Gems" (1884년)에서 이 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마드라스의 포트 세인트 죠지와 포트 세인트 데이비드의 총독이었던 토마스 피트의
수중으로 들어가 "피트 다이아몬드"라 알려졌으며 훗 날 "리젠트"라고 불리게 된
이 돌은 한 노예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410캐럿의 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망칠 목적으로 자신의 발목에
상처를 내고 붕대 밑에 숨겼다.
그는 영국배의 선장에게 자신을 안전하게 노예신분을 벗고 자유롭게 살 수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면 이 돌 가격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선장은 흔쾌히 승낙하고 그 노예를 배에 태우고 봄베이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게 되자 그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한 선장은 이것을 피트에게 1,000파운드에 팔았고 선장은 그 돈을
방탕하게 탕진하였으며 후에는 강도짓을 하다가 후회와 정신 착란증세를 일으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그러나 피트는 이 돌을 선장에게 직접 산 것이 아니고 인도의 다이아몬드 상인인
잠천드에게 48,000파고다(당시의 인도통화, 약 19,200파운드), 즉 약 10만달러의
가격을 지불하고 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은 원래 인도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는 그 곳의 군주(nizam)의 소유가
된다는 법이 있어 그 질책을 피하려고 한 변명이라고 만은 볼 수 없다.
만약 이 돌이 훔친 것이라면 매일 밤마다 실시하는 광산주들의 철저한 검색을 어떻게
피했는지 이 미스터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1702년, 토마스 피트는 그의 아들
로버트에게 이 다이아몬드를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커트하도록 지시했다.
돌은 영국 의 보석상인 해리스라는 사람에게 맡겨져 140.50캐럿의 쿠션 세이프
브릴리언트 커트로 연마되었는데 커팅하는데 무려 2년이 소요됐으며 그 비용도 약 25,000$이 들었다.
또한 그 원석에서는 많은 작은 돌이 커트되었으며 그 커트 비용은 35,000$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작은 돌 가운데 로즈 커트의 몇 개는 러시아의 피터 대왕에게 팔렸다. 단 한 군데의 아주 작은 결함을 지닌 이 "피트 다이아몬드"는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가운데 가장 멋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피트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주변에 돌고 있는 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소 문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피트가 그 다이아몬드를 지니게 된 경로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완전한 해명을 하였고 그의 무죄는 증명 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있어 이 돌의 소유는 하나의 독소가 되었다.
그는 이 돌에 대한 분실, 절도를 두려워한 나머지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결코 같은 지붕아래서 두 번 연속 잠자지 않았고 그의 거처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레이트 피트(Great Pitt)" 또는 "피트 다이아몬드(Pitt Diamond)"라 알려진
이 다이아몬드는 루이 14세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군주들로부터 팔것을 제의 받았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선뜻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1717년, 이 보석은 당시 프랑스의 섭정(regent)이었던 오를리언즈(Orleans)의 공작
필립 2세에게 팔았다.
그는 많은 망설임 끝에 스코틀랜드의 재무관 존 로우와 세인트 사이몬의 간청에 의해
당시로서는 최고의 가격인 135,000파운드를 지불하고 사기로 결정했다.
그 후 이 다이아몬드는 "리젠트 다이아몬드 (Regent Diamond)"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1774년, 이 다이아몬드는 지불된 가격의 두 배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1791년 프랑스 혁명중 그 가치는 다시 두 배로 뛰어 올랐다.
피트는 이 거래에서 10만 파운드 이상의 이득을 보았고 그의 집안의 미래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두 명의 대재상을 키워냈다.
손자인 윌리엄 피트는 7년전쟁때 사실상의 영국수상으로서 전쟁을 지도하여
인도 및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의 차남인 윌리엄 피트도 24세에 영국의 수상에 임명되어 북아메리카 독립전쟁으로
피폐된 재정(財政)을 정리하고 프랑스 혁명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때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역사가들은 아버지 윌리엄 피트를 "엘더 피트(Elder Pitt)"라고 부른다.
펜실바니아의 피츠버그는 피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1722년 듀프로와 론데에 의해 제작된 루이 15세 대관식용 왕관. 샌시(가장 꼭대기),
리젠트(밴드의 위) 두 개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모조로
대체되었다...
이 두 개의 다이아몬드와 왕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리젠트 다이아몬드는 루이 15세의 왕관에 박혀져 1722년 그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 그 외 진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이 왕관은 왕관 제조자인
론데(Ronde)의 작업실에서 만들어졌다.
맨 위의 프러더리스 (fleur- de-lis : 프랑스 왕의 문장)위에 샌시 다이아몬드를 박고
이 거대한 리젠트는 정면의 밴드 위에 세트되었다.
이 보석들은 대관식이나 그 외 다른 의식에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걷어내고
일상시에는 유리복제품을 세트하였다.
왕관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로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http://goino.zott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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